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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생각/M1

패스트 라이브즈(2023)

by thekappie 2025. 3. 21.

중첩된 존재

 

노라/나영은 단일의 주체라기 보다는 어떤 추상적인 것들의 중첩으로 보인다. 그녀의 이름은 노라와 나영의 중첩이며,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그녀의 다국적성 또한 중첩이라 부를 수 있을 테다. 영화에 등장하는 윤회사상에 따르면 그녀의 현생은 무수히 많은 전생들의 중첩일 것이다. 그녀는 남편과 있을 때 의식적으로 영어로 말한다. 남편의 한국말 연습에도 영어로 화답하며, 꿈속에서는 한국말로 발화한다. 언어로 의식과 무의식을 구분한다면, 그녀는 의식과 무의식이 중첩되어 있는 상태라고 할 수도 있다. 영어는 본인이 있어야만 하는 곳의 공용어이자, 사랑하는 남편의 언어다. 반면에 한국어는 12세 이후로는 집 밖에서 사용한 적이 없는 옛 첫사랑의 언어다.

 

노라의 한국말이 어눌하고 서툰 것은 그녀가 어린 나이에 이민을 갔기 때문이다. 그런데 해성의 한국말까지 어딘지 어색하고 서툴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캐스팅과 같은 영화 외적인 정보는 무시하자. 나는 해성의 한국말이 보통의 성인이 구사하는 한국어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12세 소년의 한국어처럼 발화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른으로서 구사되는 남편의 언어와 12살처럼 구사되는 첫사랑의 언어. 노라/나영은 성인과 소녀의 중첩이자, 아서와 해성의 중첩이기도 하다. 여기서 중첩되는 해성은 30대 중반의 실존하는 인물이 아니라, 노라 내면의 12살 소녀가 불러낸 유년기의 현현에 더 가까울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아서 역시 미국적인 것, 어른스러움, 그리고 작가라는 직업의 총체적 현신으로서 노라에 중첩되고 있다.

 

실체가 없는 사람

 

후반부 바에서 노라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두 남자가 어색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중첩되어 있던 두 개의 상이 분리되는 모습이기도 하다. 이는 현재의 노라가 과거의 나영과 조우하는 장면이자, 전생의 인연이 현생의 인연과 만나는 장면이다. 그런데 두 남자를 중첩시켜 노라/나영이라는 존재를 관측할 수 있다면, 노라/나영은 단독으로 존재할 수 있기는 한 걸까? 내가 기억하기에 노라는 단독적으로 등장하는 씬이 (거의) 없다. 새로운 레지던스로 거처를 옮기고 거울 옆 벽지에 자기 이름을 써 내려간 씬이 아마도 유일한 단독 씬일 것이다. 그녀는 항상 해성/아서와 함께 등장하거나, 해성과 영상통화의 상대방으로서 등장한다.

 

사실 그녀는 '노라'라는 이름보다도 동생이 선점한 이름을 더 원했었다. 한국을 떠난 이후로도 쉽게 풀린 것이 없었는지, 캐나다에 정착한 가족을 두고 홀로 미국으로의 2번째 이민을 도전했다. 12년 만에 연락이 닿은 옛 친구의 등장만으로 한국에 돌아가고 싶을 만큼 감정적으로 크게 동요하기도 한다. 그녀는 의식적으로 미국인이 되고자 하지만 쉽게 자리잡지 못했고, 그런 고충은 서둘러 결혼을 선택한 이유 중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어디에서든 잘 자라는 미나리 같은 사람이 아니다. 앞서 말한 거의 유일한 단독 씬을 다시 떠올려보면, 작은 방 한 칸에 노라 문이 있었노라 기록하는 몸짓이 처절해 보이기까지 한다. 해성의 말마따나 노라는 떠나는 사람, 혹은 떠나야만 하는 사람이다. 여기가 아니면 다른 곳으로, 이번 생이 아니라면 다음 생으로라도.

 

유년기의 끝

 

노라/나영에게 중첩되어 있는 또 하나의 인물이 있다면, 당연히 셀린 송 감독 본인일 것이다. 익히 알려져 있듯 이 영화는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인터뷰*1에 따르면, 아서와 해성이 마치 노라의 일부처럼 보이는 것은 감독 스스로의 경험에 기반한 연출일지 모르겠다("translating between these two parts of myself as well"). 하지만 자서전은 수치스러운 일을 밝힐 때만 신뢰를 얻을 수 있다던 조지 오웰의 말처럼, 영화 속 노라가 중첩된 상으로만 존재하는 이유는 그저 감독 스스로 감추고 싶은 부분이 더 많았기 때문 아닐까? 즉, 영화에 투영하고자 했던 실제 본인의 삶이 정말로 주체적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본모습을 조금도 투영하고 싶지 않아서 노라는 주변 인물과의 관계로만 겨우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다른 관점에서는 감독 스스로의 처지에 대한 자조적인 연출일지도 모르겠다. 이제 막 입봉을 마친 신인으로서 온전히 본인 이름으로 불리기 전까지는, 셀린 송 감독에겐 한동안 '송능한 감독의 딸' 혹은 '한국계 캐나다인' 따위의 수식어가 따라다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노라 내면의 유년기를 담당하던 해성을 택시에 태워 보내는 마지막 순간은 더욱 뭉클하게 다가온다. 유년기와 결별하는 노라처럼 자기 자신에게 드리워져 있는 수식어들을 떨쳐 내겠다는 감독의 출사표 같아서.

 

가족의 해체

 

해성과의 작별 시퀀스는 올해의 엔딩으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과거로 거슬러 가는 듯한 역방향으로의 트래킹, 해성이 나영을 뒤돌아 보며 과거의 시공간이 중첩되는 순간의 강렬함, 그리고 다시 순리를 따르듯 정방향으로의 트래킹 후 남편과의 재회. 남편과 포옹하며 함께 현관을 오르는 노라의 마지막 뒷모습은 분명 감동적이지만, 동시에 애상적인 기운이 감돌고 있다. 이민자를 다룬 영화에서 '가족' 혹은 '가족애'라는 가치는, (<미나리>, <엘리멘탈> 등 최근의 영화에서도) 하나의 율법과도 같은 무한한 긍정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패스트 라이브즈>의 가족들은 그다지 끈끈해 보이지 않는다.

 

이민 온 뒤로 한국말은 엄마하고만 사용한다던 노라의 말에서 은밀히 암시되는 아버지의 부재, 결혼 7년차이지만 아직도 자녀 계획이 전혀 없어 보이는 아서와 노라. 그리고 결혼제도에 대한 노골적인 조소. 예컨대 조건이 맞아 서두르거나(영주권), 조건이 맞지 않아 늦어지는(경제력) 요즘 시대의 결혼. 서로 간 한 마디 대화도 없던 나영의 부모님과 해성의 부모님. 아서는 노라에게 해성과의 데이트를 막을 자격이 없다고 말하지만, 정작 세면대 앞에 서있는 노라를 사이에 두고 아서와 거울에 비친 또 다른 아서가 양 옆을 가로막는 형국. 이건 두 사람의 행실이나 질투에 관한 얘기가 아니라, 결혼 자체에 대한 이야기다. 어쩌면 결혼생활이 노라에게 또 다른 '한국'이 되어버린 건 아닐까?

 

그러니까 이건 해성의 등장으로 불쑥 찾아오는 아침드라마 식 부부의 위기가 아니라, 노라의 삶에 늘 존재해 온 본질적인 위태로움이 은연중에 드러나는 것이다. 나는 바로 이 점이 <패스트 라이브즈>가 가진, 기존 디아스포라 영화들엔 없는 차별화된 장점이라 생각한다. 가족의 힘으로 이민자의 삶을 개척하던 이야기는 이제 그만두자. 지금은 조부모를 한국에 두고, 부모는 토론토에 있고, 나는 뉴욕에 건너와 살지만, 내 후손은 없는 시대 아닌가. 가족은 해체되었고, 부부는 간신히 서로를 붙잡고만 있다. 미나리는 이제 뿌리를 내리지 않는다.

 

 

*1. Feinberg, Scott (2024-02-24). "'Awards Chatter' Podcast: Celine Song on True Story Behind 'Past Lives,' Final Draft's Subtitles Problem and the 'In-Yun' in Her Life" The Hollywood Reporter (Podc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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