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한국영화의 소년들.
약 20년 전, 허문영 평론가는 한국영화의 '소년성'에 대한 단상을 남기며 충무로의 한 가지 굵직한 경향성을 살펴본 바 있다. 그러면서 그는, 감독도 관객도 나이를 먹어갈 것이라는 멋진 말로 한국영화의 소년기가 슬슬 막바지에 다다른 것 같다고 조심스럽게 진단했다. 그 진단이 정확했던 것일까. <친구>, <공동경비구역 JSA>,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 <왕의 남자>까지, 대략 2005년을 분기점으로 이 화려했던 라인업을 뒤로하고, 당시 흥행기록을 갈아치운 <괴물(봉준호)>의 등장과 함께 한국 영화계는 소년 코드와 작별하고 장르 영화의 잠재력에 눈을 돌리는 것 같았다.
감독 김성수의 전작 <아수라>의 남자들은 많은 것들을 포기하면서까지 캐릭터 고유의 야수성을 지켜냈고, 이제는 소년의 태를 벗은 수컷들이 한국 느와르를 점령한 지도 오래된 듯하다. 2010년대 이후의 한국 느와르는 얼마나 '악인' 캐릭터를 정교하고 매력적으로 빚어내느냐에 몰두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과정에서 종종 소비되는 소년스러운 천진난만함(예. <베테랑>의 유아인)은 캐릭터의 매력과 잔인함을 끌어올리는 데에 기여할 뿐 허문영이 지적했던 소년성과는 거리가 멀다. 앞서 언급한 단상에서 허문영은 '아버지의 부재'를 비롯한 소년성의 세 가지 특성을 정의했다. 나는 거기에 두 가지의 특성을 덧붙이고 싶다.
하나는 우리의 소년들이 겁에 질려있다는 것이다. 그 두려움은 전쟁 따위의 외부 환경에서 기인하는 공포라기 보다는, 존재의 인정을 갈구하는 실존적 몸부림처럼 보인다. 소년들은 자신의 세계에서 쓸모 있는 놈, 바꿔 말해 어른으로 인정받고 싶어 한다. 즉, 소년은 아버지의 부재로 세계에 홀로 던져졌고, 스스로 아버지가 되고자 한다. 그러나 이 '소년성'을 부여받은 한국 영화 속 소년들은 아버지가 되지 못한 채 죽는다. 허문영은 이 실패에서 비롯되는 비극이 곧 소년성의 핵심이고, 위 라인업에게 흥행 성공을 가져다준 열쇠로 보았다. 봉준호의 말마따나, 비극적 결말이 한국에선 상업적으로 먹혀드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서울의 봄>을 보면서 잔향처럼 귀에 맴돌았던 대사는 "니 안무섭나"였다. 이 대사는 반란군과 진압군 진영을 가리지 않고 수시로 등장한다. 나는 여기서 대답하는 자(부하)들이 진정 무서워하는 것은, 실패할 때의 결과(최선의 경우라도 좌천 및 옥살이, 최악의 경우 사망) 자체라기보다는 충성심을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소년들(신체적 나이와 무관한)은 당장 죽을 것이 확실하더라도, 내 상관을 끝까지 모셔야 한다. 여기서 무섭다 혹은 무섭지 않다고 발화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죽기 전까지 상관 곁을 지키는 것만이 이 질문의 모범답안이다. 그리고 이 소년들은 무섭다. 내가 상관에게 버림받을 것이.
(극 중 노태건 장군과 오진호 소령이 유독 앳된 얼굴을 하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들은 충성심을 증명했고, 각자의 상관(아버지)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또 하나의 특성은 소년들이 충동적으로 죽음에 이끌린다는 것이다. 인정받지 못한 자들, 충성심을 저버린 자들, 의리를 저버렸던 자들은 죽음으로서 이를 만회한다. 허문영은 <친구>나 <공동경비구역 JSA>에서의 죽음은 우정(형제애) 신화의 완성이라 보았다. 때때로 이런 결말은 그동안의 과오를 은폐시키고, 우리의 소년이 진정한 친구로서 혹은 명예로운 군인으로서 죽을 수 있도록 복권시키는 강력한 장치가 된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오직 죽음만이 이들의 인정 수단인 셈이다. 소년은 죽음을 각오하며 무형의 가치를 지켜내고 인정받거나, 그것에 실패한 뒤 자결하여 사후적으로 인정받는다.
그런 의미에서 노태건은 우리가 20년이 지나 스크린에서 다시 만난, 전형적인 소년이다. "열차가 앞만 보고 달리는데, 뛰어내릴 사람 있냐"는 대사는, 이 열차의 종착지가 실패(죽음)여도 상관없다는 것이고, 오히려 그 열차에 올라타고 싶은 충동을 자극한다. 그는 증명했지만 아직 아버지(전두광)로부터 인정받았는지 확신이 없다. 그래서 회식자리에서 "우리 아직 친구 맞제?"라는 투박하고 낡은 대사로 묻는다. 인정받기 전까지 그는 두렵다. 그리고 인정받을 수만 있다면 계속해서 스스로를 죽음으로 내몬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만난 이 한국 영화의 소년들을 환영해야 할까. 나는 이에 소극적이고 싶다. 일개 평론가가 정의 내린 소년성이라는 개념의 등장과 퇴장이, 결코 한국 영화계의 전진과 후퇴를 의미하진 않는다. 그렇지만 이 소년성에서 지독하게 넘쳐흐르는 거대한 파토스는 어찌해야 할까. 소년 영화의 과정엔 낭만이 있고 결과엔 비극이 있다. 이걸 마다할 관객은 별로 없을 것이다. 관객들은 본작에 천만영화 타이틀을 걸어주는 것으로 화답했다. 이걸 마다할 제작사 또한 없을 것이다. 앞으로 꽤나 오랫동안 극장에서 소년들을 만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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