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효자의 꿈.
영화 따위에 개인적인 얘기를 꺼내기 조심스럽다. 그래도 영화를 보면서 든 생각을 어딘가에는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모자갈등이든, 고부갈등이든, 모든 가정 내 불화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반복된다. 아리 애스터의 세계에서도 그럴 것이고, 나 또한 예외가 아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모친을 증오하는 마음에 이 영화를 봤다. 더 정확하게는, 그런 마음가짐에 대한 면죄부를 얻을지 모를 기대감에 이 영화를 골랐다.
의외로 잘 언급되지 않는 부분 중 하나는, 보가 칼에 찔린 신체 부위에 관한 것이다. 전작들과 달리 고약한 고어연출을 최대한 자제한 감독은 보의 손바닥을 뚫고 나가는 칼날과 옆구리의 자상은 뚜렷하게 보여주었다. 이틀을 푹 자고 사흘째에 깨어나는 것까지, 노골적으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빗대고 있는 이 연출엔 보의 일대기로 성경을 다시 쓰려는 어떤 야심이 느껴지기도 한다. 굳이 보를 예수와 동일선상에 두지 않더라도, 여러 형태로 반복되는 아버지의 부재는 보의 모친을 동정녀 마리아로 환원시킨다. 또한 보의 여정을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에 비할 수도 있을 것이고, 영화의 주제를 역-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야기를 근원적이고 신화적이고 종교적인 알레고리로 깊숙이 끌고 가는 감독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지상에 태어난 모든 아들들(남근들)은 이 이야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일단 나는 동의한다.
차에 치이기 전 어머니에게 줄 성모상을 들고 있는 보와 경찰관이 대치하면서, 보는 무기를 버리라는 요구에 응해야 한다. 마침 알몸으로 서있는 보가 소유한 무기는 (오랫동안 사회문화적으로 흔히 비유되어 왔듯이) 남근밖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기대와 달리 진짜로 버려지는 무기는 성모상, 어머니를 위한 선물, 즉 효심이다. 어쩌면, 특정 상황에서는 이 효심 또한 남성들이 휘두르는 무기일지도 모르겠다. 억지일지라도.
아내가 늘 진담반 농담반으로 하는 얘기가 있다. 여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남편상은 "효자"라고. 에먼 제삿상, 차례상 차림에 고생하는 며느리들이 이제는 제법 자취를 감췄다고 말할 수 있다면, 반대로 이런 얘기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한국 사회에서 처가 식구들의 결합은 늘 긍정적이고 권장되는 일이다. 아내의 친정 방문은 일상적이고 반복적인 이벤트이며, 심지어 남편들도 이를 부추기는 실정이다. 이런 경향은 아내에게 자매가 있는 경우, 부부에게 자녀 계획이 있는 경우 더욱 강화된다. 그런데 반대의 경우는 그다지 권장되지 않으며, 그렇다고 남편 혼자 양친을 뵙고 오는 옵션도 달가운 시선을 받지 못한다. 가장 유서 깊은 갈등 요소 중 한 가지에 새삼스레 불을 지필 마음은 없다. 그런 현상이 있다고 생각할 뿐이다.
아내의 관점에서 나는 효자였고, 지금은 아니라고 나홀로 생각하지만, 앞으로도 나를 효자라 평할 것 같다. 결혼을 준비하던 과정에서 아내가 깊은 상처를 받았고, 나는 그 길로 효심을 버렸다(고 생각한다). 그때 내가 알량한 효심 같은 걸 손에서 놓지 않았다면 지금의 아내에게 더 큰 상처가 남았을 것이다. 만일 이 글을 읽고 있는 누군가의 아들이 있다면, 본인의 모친을 통제할 수 있다는 환상 같은 건 일찌감치 버리는 게 좋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 이즈 어프레이드>의 세계관은 판타지보단 오히려 다큐에 가깝다.
그렇다면 왜 남성들은 불효자의 길로 접어드는 가? 보가 꾸는 꿈, 내 자손을 얻고자 함이 곧 모든 아들들의 꿈이기 때문이다. 나는 생물학적 본능이나 유전학적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라, 남성의 무의식 속 깊은 층위에서 꿈틀대는 욕망을 말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보가 꿈꾸는 미래에는 아들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예로부터 왕들이 세손을 얻는 일에 필사적이었던 단순한 사례에도, 거기에는 어떤 근원적인 욕망이 관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왕위 계승이나 남아선호사상 따위의 표면적 사유 아래 어둡고 깊은 곳에 자리하는 원시적 갈망. 아버지는 아들을, 남근은 남근을 낳고자 한다. 그렇게 불멸을 꿈꾼다. 딸은 페인트를 들이켠다.
한 가지 욕망이 더 튀어나온다. 영화 초반부 상담사는 보에게 "어머니가 죽길 원하냐"라고 물으며, 그런 감정은 어머니를 사랑하는 마음과 공존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좀 더 정확한 질문은 이것이다. "어머니를 죽이길 원하나". 자식을 얻으려면 배필을 얻어야 하고, 배필을 얻으려면 모친이 존재해서는 안된다. 득남의 꿈이 존속 살인의 꿈으로 연계된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보의 여정을 되짚어보면 어딘가 이상하다. 보는 아들 된 도리를 다하고자, 어머니의 장례를 제대로 치르기 위해 본가로 돌아갔다. 그런데 보의 일련의 행위들은 꼭 어머니의 생사 확인 및 확인 사살에 이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관 속의 시신이 모친이 아닌 것을 분명히 확인하고도 일레인과 관계를 했고, 결과는 일레인의 죽음이었다. 보가 어머니의 목을 조르는 건 우발적 행위가 아니라, 모친과 배필의 공존 불가능성을 뒤늦게 깨달은 다음 찾아오는 필연이다. 다시 생각해 보니 보가 떨어트린 무기는 성모, 예수의 어머니였다. 일레인을 찌른 흉기는 효심이 아니라 어머니란 존재 그 자체다.
부모의 극성이 자식 혼삿길 막는 것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대범한 상징놀음으로(예수 조차도 엄마의 죽음을 원했을 것이라는 듯한) 광범위한 사회 현상과 개인적인 경험을 도발적으로 관통하며, 자칫 진부할 뻔한 이야기에 자신만의 색채로 숨결을 불어넣었다. 문제는 결말에 있다. 어머니에게 소홀했던 죄로 재판을 받는 보. 어머니의 죽음을 원하고 있냐는 질문 뒤에 상담사는 "Guilty"라는 메모를 남긴다. 보에 대한 판결이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듯, 아들로 태어난 삶은 어쩌면 그 자체로 원죄이다. 하지만 이 재판은 뻔하게도, 어머니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아 사형 선고를 받은 뫼르소를 연상시킨다. <이방인>이 내게 안겨줬던 충격에 비하면 보는 너무나 비루하고 보잘것없다. 나는 언제나 마비된 이성에 철퇴를 내리치는 것이 예술가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방인>을 떠올리게 하는 여러 영화를 보면서, 만족스러웠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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