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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생각/M1

기생충 재관람

by thekappie 2020. 3. 14.

지난달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작들 재개봉 이벤트가 있어서 기생충을 2차 관람했다.

 

사실 1차 관람 때의 충격이 워낙 커서 처음 볼 때만큼의 짜릿함은 없긴 했는데,

대신 봉준호 감독 특유의 장난스러운 암시들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었다.

 

예를 들면, 지하실을 둘러보던 기택이 소감이 남기는 장면이 그렇다.

"이런 데서 어떻게 산거야... 살면 또 살아지나?"

살면 또 살아지는지 기택이 몸소 체험하게 된다.

 

또는 차 뒷좌석에서 팬티를 발견한 박사장이 연교와 심각하게 대화를 나누는 장면도 그렇다.

박사장이 목소리를 낮추며 "지금 진짜 중요한 게 뭔지 알아?"라고 연교에게 마약 얘기나 운운할 때,

카메라는 둘 사이로 보이는 저 뒤쪽 부엌의 지하로 가는 계단을 조용히 클로즈업한다.

진짜 중요한 건 저기에 있는데...

 

근데 그런 것 보다도, 2차 관람 시 계속해서 나를 거슬리게 한 인물이 있다.

그건 바로 기택(송강호)이라는 인물이다.

이 영화는 노골적으로 기택의 실패만을 비춘다.

혹은 기택이 벌이는 모든 일은 실패로 돌아간다.

기택을 실패 그 자체를 상징하는 인물로 보여준다.

 

이건 두 가장의 극단적인 대비를 고려하면 더욱 끔찍하다.

기택의 가족에겐 기택이라는 가장을 둔 것이 거의 재앙에 가까운 수준이다.

 

그는 이미 두 번의 사업을 말아 먹었다.

기우와 기정은 박사장 네 집에 취업하면서,

전에 없던 고용을 창출하고(미술치료사) 기존의 고용자를 해고하도록 손쓰고

그 대체자를 소개해주는 모든 과정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해낸다.

송형국 평론가가 일전에 분석하였듯 '유동적' 현대 사회에서 약자가 능력껏 지녀야 하는 '유동적' 자세다.

 

기택이 병원에서 문광을 봤다는 대사 연습도 하고, 벤츠 매장에서 오디션 준비를 한 것은 칭찬할 만 하나,

기존의 고용자를 해고하는 과정에서 선을 한번 넘어(연교의 손을 잡는 순간) 불편한 분위기를 만들고,

그 대체자를 소개하는 과정에서 굳이 불필요한 말을 하고 차사고도 낼 뻔하여 박사장의 기분을 몹시 언짢게 만든다.

 

차라리 이런 일상적인 '실수'는 애교로 넘어갈 수 있다.

기택의 실패는 멈출 줄을 모르는데...

지하실이 처음 공개되고, 충숙과 문광이 일종의 정상회담을 하는 중요한 순간에

계단 위에 숨어 엿듣다가 발이 미끄러져 기우와 기정까지 들키게 만든 자도 기택이었다.

 

결국 주도권은 문광에게 넘어가고, 어쩌면 가능했을지도 모르는 두 가족의 불편한 공생은 영영 합의점을 못 찾고

어느 한쪽을 반드시 축출해야 하는 극단적인 상황이 초래됐다.

 

비가 많이 내리던 그 날, 기정이는 빠릿빠릿하게 청소도 하고 기우에게 다혜의 다이어리도 챙겨주고,

충숙은 난생처음 들어본 짜파구리를 소고기도 넣어서 제시간에 성공적으로 만든다.

그때 기택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

 

그전에, 나는 1차 관람 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의문점을 찾고 그에 대한 답도 찾을 수 있었다.

즉, 이 질문을 먼저 해봐야 한다.

그건 바로, 집 앞의 취객을 쫓아낼 때에 수석을 제대로 들지도 못했던 비실이 기우가

왜 지하실의 그 모든 것을 '은폐'하려는 결심을 하고 수석을 들고 내려갔는가?

그래서 왜 결국 어김없이 수석을 놓치고 본인 머리가 깨지게 됐는가?

 

그건 바로, 폭우가 쏟아진 그날 반지하 집으로 돌아가면서 기정이 던진 물음에 대한 기택의 답변 때문이었다.

"그 사람들.. 어떻게 했어?"

"꽁꽁 묶어놨지.."

 

물론 기택이 둘을 꽁꽁 묶어놓긴 했다.

근세는 정말로 꼼짝 못 하도록 지하실 파이프에 그를 고정시켰지만,

문광은 손발만 묶었을 뿐 위치를 고정시킨 것은 아니었다.

이 실수 하나로, 문광은 정신을 차린 뒤 이빨로 근세의 테이프를 끊어주었고,

돌 하나 제대로 못 드는 기우는 제 아비 말만 믿고 지하실에 들어갔다가 역공을 당했다.

 

이렇게 말하면 잔인할지도 모르겠지만, 딸을 죽게 만들고 아들은 죽을 뻔하게 만들고

아내는 전과범으로 만들고, 이미 오래전부터 이 가정을 지하(또는 저승)로 떠민 것은 기택이다.

 

그에 반해 박사장은 다소 모자란 와이프와 자식들을 차고 넘치게 먹여 살리는 훌륭한 가장이다.

컵스카우트인지 뭔지 훈련을 받고도, 간단한 모르스 부호 하나 해석하다 때려치우고 꿀잠 자는 다송이.

침대 밑에 '기생충'이 숨어있다고 강아지가 알려 줘도, 갑자기 생각난 짜파구리가 더 중요한 다혜.

믿음의 벨트 운운하면서 온갖 기생충들 집안에 돈 주고 들인 'The simple' 연교.

 

이런 가족을 두고 박사장은 사업도 성공하고, 가족과의 시간도 재미있게 보낸다.

무엇보다 그 가족 중에 가장 면역력이 깨어있다.

주의 깊게 안 보면 모를 수도 있는 뒷좌석의 팬티도 바로 찾아내고,

왜 2인분을 먹는 걸까 더 깊게 의심하진 않았지만 문광이 많이 먹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고,

기택이 차 안에서, 거실 테이블 밑에서 내뿜는 냄새도 가장 먼저 알아챈다.

 

비교하면 비교할수록 차이나는 두 가장의 모습.

잘난 가장이 못난 가장의 손에 죽는 결말도,

못난 가장이 온 가족을 망치고 못난 가족이 잘난 가장을 망치는 결말도,

못난 가장을 위한 자리는 깊은 지하실에 마련되어 있다는 결말도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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